- 수정 2025-09-04 19:10
- 등록 2025-09-04 18:50

조국 조국혁신당 혁신정책연구원장(가운데)이 총무원장 진우 스님을 예방하기 위해 4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를 방문했다. 연합뉴스
<기사 일부::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을 고발한 강미정 대변인이 당의 미온적 대응과 조국 혁신정책연구원장의 침묵을 비판하며 4일 탈당했다. 이날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교육연수원장이 성비위 사건과 관련해 2차 가해성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지자,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윤리감찰단에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강 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성비위) 사건이 접수된 지 다섯달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피해자 지원 대책은 그 어떤 것도 마련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이뤄졌어야 할 피해자 보호와 회복이 외면당하는 사이 피해자들은 당을 떠나고 있다”며 “이것이 (당을) 떠날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답답한 현실에 화담은 니체에게 물었다.
니체의 관점에서 "권력 의지"와 권력 구조
니체는 도덕적·정치적 담론 속에 숨겨진 권력 의지를 꿰뚫어 보려 했다. 성비위 사건 자체보다도, 당의 대응, 연구원장의 침묵, 그리고 강 대변인의 폭로와 탈당 모두가 “권력 의지”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
- 당 지도부는 사건을 최소화하거나 은폐함으로써 ‘체제 유지’라는 권력 의지를 드러낸다.
- 강 대변인은 내부 고발을 통해 “도덕적 정당성”을 무기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권력 의지를 행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체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선하거나 옳은가”보다는 “누가 어떻게 힘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다.
"피해자 보호"의 부재와 니체적 비판
강 대변인이 강조한 것은 피해자 보호의 부재인데, 니체적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정의”보다도 “생명력의 긍정”이다. 즉, 피해자가 존엄을 지키며 다시 설 수 있는가, 그를 억압하는 제도가 오히려 삶의 힘을 고갈시키고 있지는 않은가가 핵심이다. 당의 미온적 대응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가 싫어했던 허무주의적 태도, 즉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며 무력하게 현상 유지에 매달리는 태도”로 보일 수 있다.
강 대변인의 행위를 현 시국에서는 '무례함'이라고 말하면, 또 3차 성가해라고 할 수 있다
강 대변인의 행위는 '무례함'이었나? '무례함'은 중요한 포인트다. 니체는 ‘무례함’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예의”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위선을 종종 벗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강 대변인의 날 선 언사가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이 “기득권적 위선을 깨뜨리는 힘”이라면 오히려 니체적 의미에서 긍정될 수 있다.
다만, 만약 그 언사가 타인을 억압하거나, 스스로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덕적 우월감의 연출에 불과하다면,
니체는 그것을 “노예 도덕의 연장”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즉, 남을 깎아내림으로써만 힘을 확보하는 태도는 그다지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
'내'가 여성임에도 강 대변인의 태도에서 무례함을 느낀 건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니체는 ‘집단적 정답’을 강요하지 않고, 개인이 느끼는 고유한 감각을 존중한다. 중요한 것은 그 감각을 무시하지 않고,
“왜 내가 이렇게 느끼는가?”를 묻는 것이다.
- 혹시 그 무례함이 피해자 보호를 위한 ‘필요한 돌파력’이라면, 불편하지만 긍정할 수도 있고,
- 만약 그것이 단지 정치적 퍼포먼스라면, 불편함 속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니체라면 “너의 감각은 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 감각을 단련시켜 사태의 진실을 뚫어보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 정리하면, 강 대변인의 행동은 니체적 의미에서 위선을 폭로하는 힘일 수도 있고,
동시에 도덕적 권력투쟁의 도구일 수도 있다. 60년 이상 살아보니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틀리지 않다는 경험을 수없이 했기 때문에, 선뜻 선입견을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느낀 무례함은 올바르냐 잘못이냐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감각을 통해 사태를 다시 질문해 보라는 니체적 촉구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