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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아니 억만금의 공항이 들어선대도

담빛 2025. 8. 23. 09:28

 

 

새만금

 

 

수라갯벌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흔히 “멸종위기종 보존”이나 “보편적 가치”라는 언어로 표출된다.

그러나 니체적 시선에서 보자면, 이러한 언어는 단순히 ‘객관적 가치’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맺는 권력-가치의 관계를 드러낸다.

 

니체는 모든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보지 않고,

그것을 특정한 시대와 힘의 의지(Wille zur Macht)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수라갯벌을 지켜야 한다는 외침은 단순히 환경 보존의 논리가 아니라,

삶을 긍정하려는 새로운 가치 창출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게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과 자연이 동일한 디오니소스적 생성과 파괴의 흐름 속에 있다고 본다.

갯벌은 끊임없는 생성의 장(場)이며, 그 속의 생명들은 무수한 힘의 형식으로 살아 움직인다.

 

이를 인위적으로 파괴하고 ‘신공항’이라는 거대한 기술적 장치를 세운다는 것은,

디오니소스적 생성을 억압하고 아폴론적 질서와 계산으로만 세계를 재단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니체가 경계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일방적 합리화에 의한 삶의 축소였다.

 

그렇다고 니체가 단순히 “자연을 보존하라”는 생태윤리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삶의 본질을 투쟁과 변용으로 보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투쟁이 더 많은 삶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힘을 고갈시키고 빈곤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수라갯벌은 수많은 생명형식들이 얽혀 살아가는 힘의 무대다.

그것을 없애고 공항을 세우는 것은 새로운 힘의 확장이 아니라,

오히려 단일한 경제적 효용 논리에 갇힌 빈곤한 의지의 표출이다.

 

니체적 사유 속에서

우리는 수라갯벌을 단순한 ‘보존 대상’이 아니라,

힘의 다양성과 생성의 원천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라는 보존의 논리보다 더 깊다.

그것은 존재의 긍정, 곧 죽음과 소멸마저 끌어안으며

삶을 더 충만하게 하는 긍정의 장으로서의 갯벌이다.

 

신공항 건설의 논리는 이 긍정을 가로막는, 퇴행적이고 협소한 힘의 의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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