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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이 부끄럽지 않은 사회 [세상읽기]

담빛 2025. 8. 20. 10:58

 

  • 수정 2025-08-20 09:04
  • 등록 2025-08-20 08:00

 

<기사일부::김정석 |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한국인구학회장

 고령화는 거스를 수 없는 확정된 미래다. 그런데 이 말은 대체로 어둡고 불안한 느낌 속에서 쓰인다. 장수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바람이었다. ‘백세시대’라는 표현이 낯설었던 시절, 오래 사는 것은 신의 축복처럼 여겨졌다.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장수를 누리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최근의 일이다. 의료기술 발달, 영양상태 개선, 사회 안정 등이 맞물려 현대사회가 이룩한 성취다. 하지만 개인에게는 행운이고, 인류에게는 업적이라 할 수 있는 고령화가, 사회적 부담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각인되는 상황은 어쩌면 모순이 아닐까.>

 

니체의 사유: 늙음과 삶의 긍정

니체는 늘 묻는다. “너는 네 삶을 다시 또다시 원하느냐?”

— 이것이 영원회귀의 물음이다.

늙음 또한 삶의 한 국면으로서,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우리가 늙음을 불안·부담·쇠퇴라는 언어로만 포착한다면,

그것은 곧 “다시 원하지 않는 삶”으로서 부정적 평가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바라는 것은 다른 방식의 시선, 곧 늙음을 포함한 삶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다.

 

고령화가 사회적 위기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을 ‘생산성의 상실’이라는 협소한 잣대에서만 재단하기 때문이다.

 

니체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근대적 ‘노예도덕’의 또 다른 변형이다.

인간의 가치는 단순한 생산·효율·젊음의 잣대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어떻게 해석하고 예술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늙음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노년은 쇠퇴의 단계가 아니라

삶을 성숙시키는 또 다른 양식임을 긍정해야 한다.

 

니체는 “예술이야말로 삶을 정당화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년의 삶을 예술처럼 해석하고 창조하는 일이야말로 늙음의 긍정이다.

주름은 ‘결핍의 흔적’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문장”으로 읽힐 수 있다.

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의 형태—성찰, 관조, 이야기, 지혜—로 변환되는 것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쇠퇴가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계속되는 힘의 의지다.

 

따라서 고령화 사회를 두려움이 아니라 긍정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적 복지 확충이나 부담 완화만이 아니라,

노년 자체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관점 전환이다.

 

젊음과 경쟁하는 노년이 아니라, 새로운 생의 미학을 창조하는 노년.

니체의 언어로 말하자면,

늙음은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충만이 다시 화해하는 시기”로 이해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늙음을 부끄러움에서 긍정으로 전환하는 힘”을 요구합니다.

이는 곧 노년을 하나의 쇠퇴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긍정하는 또 다른 창조적 단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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