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정 2025-08-05 23:02
- 등록 2025-08-05 18:00

공정이라는 신화와 권력의 위선 ― 니체, 이춘석 사태를 묻다.
차명 주식거래 의혹이 제기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의 행위는,
도덕적 기준으로 보자면 분명 ‘잘못’이다.
그러나 니체라면 단순히 잘잘못을 따지는 데 머물지 않고,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것이다.
“왜 우리는 아직도 권력자에게 '공정'이라는 것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그 공정이라는 말은 도대체 누구의 필요로 만들어졌는가?”
니체는 도덕을 신의 계시가 아닌 인간의 해석, 그중에서도 약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노예도덕’이라 보았다.
이 노예도덕은 강자에게 죄책감을 씌우고,
약자를 ‘선한 자’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의 무기력을 정당화한다.
이때 ‘공정’이라는 말도 단지 강자를 견제하기 위한 도덕적 장치일 수 있다.
그 말은 항상 불공정한 자를 비난하는 데 쓰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반복되며 체제의 허구만 강화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정’을 누구보다 자주 외치는 자들이 권력의 중심에 설 때,
그들은 종종 자신이 외친 그 공정의 기준을 가장 먼저 배신한다.
니체가 꿰뚫은 ‘허위의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인간이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은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선과 자기기만으로 만든 도덕의 가면을 쓴다.
권력자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 필요로 한다.
이춘석 의원의 사태는 단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도덕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정치 구조 전체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법을 만드는 자들이 법을 가장 쉽게 무력화시키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게 되는가?
왜 권력을 가진 자일수록 도덕을 말하면서 동시에 도덕을 조롱하는가?
니체는 인간의 본질을 ‘힘에의 의지’라 보았다. 모든 생명은 더 큰 힘을 추구한다.
도덕이란 그 힘을 은폐하거나 위장하는 도구일 뿐이다.
권력자가 ‘공정’을 말하는 순간, 그는 이미 그 언어를 통해 자기 권력을 더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 위버멘쉬는 이러한 위선을 넘어선다.
그는 도덕을 외부에서 강요된 규범이 아닌, 스스로 창조한 가치로 살아간다.
‘공정’은 주어지는 이상이 아니라, 스스로 감당해내야 할 창조의 실천이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너의 도덕은 너의 것이다. 너는 그것을 살아야 한다.”
법을 만드는 자가 법 위에 서고, 공정을 말하는 자가 그 공정을 스스로 거짓말로 만든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말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쓴 자의 힘과 욕망,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허무주의를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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