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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 위자료 ‘윤석열의 10만원’ [뉴스룸에서]

담빛 2025. 7. 29. 09:55
김태규기자   수정 2025-07-29 07:35  // 등록 2025-07-29 07:00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11월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니체 철학으로 읽는 “국가의 위로”는 가능한가?


통장의 숫자가 ‘위로’인가?

“국가는 가장 냉정한 괴물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 국민 위자료’라는 표현은 전례 없는 감정적 언어다.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위자료”**라는 말은 정부가 **“우리가 고통을 줬음을 인정한다”**는 정치적 고백이자,
그 대가를 현금으로 지불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국가가 진정성 없이 인간의 상처에 값을 매기는 행위,
실존적 고통에 숫자로 답하는 허위의 제스처로 읽힌다.


허무주의의 위로, 그리고 가격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위안이 되는 것을 믿는다.”

10만 원은 위안인가? 아니면 위안의 가면을 쓴 무의미인가?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인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할 의미를 찾지 못하면,
‘쾌락’이나 ‘보상’, ‘환각’으로 삶을 대체하려 한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윤석열의 10만 원’은
국가가 **“미안하다, 그러니 이걸 받아라”**라고 말하는
통제된 감정 분배이며, 주권자의 자존을 돈으로 가리는 허위의 포장일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 정면대면 vs. 아폴론적 봉합

니체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뚫고 나가는 존재의 변형을 추구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10만 원보다,
왜 우리가 고통받았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함께 넘어설지,
국가가 어떻게 책임을 질지를 말해주는 정치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위자료 지급’은 아폴론처럼 형식과 평온함만 유지하며,
진실과 상처를 직면하지 않는 정치의 또 다른 무대에 불과하다.

“진정한 위로는 돈이 아니라, 진실을 감당하겠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진실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더라도
혼돈 속에서만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윤석열의 10만 원’은 고통의 대가가 아니라
국가의 무능을 현금으로 봉합하려는 상징적 보상이다.

니체라면 묻는다:

“10만 원은 얼마짜리 위선인가?”


열 손가락에
고통을 접어 쥐고
돈을 내민다

 

묻지 말라고
쥐여준 현금 한 장
그건 위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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