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 11월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니체 철학으로 읽는 “국가의 위로”는 가능한가?
통장의 숫자가 ‘위로’인가?
“국가는 가장 냉정한 괴물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전 국민 위자료’라는 표현은 전례 없는 감정적 언어다.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위자료”**라는 말은 정부가 **“우리가 고통을 줬음을 인정한다”**는 정치적 고백이자,
그 대가를 현금으로 지불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국가가 진정성 없이 인간의 상처에 값을 매기는 행위,
즉 실존적 고통에 숫자로 답하는 허위의 제스처로 읽힌다.
허무주의의 위로, 그리고 가격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위안이 되는 것을 믿는다.”
10만 원은 위안인가? 아니면 위안의 가면을 쓴 무의미인가?
니체는 허무주의 시대에 인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할 의미를 찾지 못하면,
‘쾌락’이나 ‘보상’, ‘환각’으로 삶을 대체하려 한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윤석열의 10만 원’은
국가가 **“미안하다, 그러니 이걸 받아라”**라고 말하는
통제된 감정 분배이며, 주권자의 자존을 돈으로 가리는 허위의 포장일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 정면대면 vs. 아폴론적 봉합
니체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뚫고 나가는 존재의 변형을 추구했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10만 원보다,
왜 우리가 고통받았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함께 넘어설지,
국가가 어떻게 책임을 질지를 말해주는 정치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위자료 지급’은 아폴론처럼 형식과 평온함만 유지하며,
진실과 상처를 직면하지 않는 정치의 또 다른 무대에 불과하다.
“진정한 위로는 돈이 아니라, 진실을 감당하겠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진실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더라도
그 혼돈 속에서만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윤석열의 10만 원’은 고통의 대가가 아니라
국가의 무능을 현금으로 봉합하려는 상징적 보상이다.
니체라면 묻는다:
“10만 원은 얼마짜리 위선인가?”
열 손가락에
고통을 접어 쥐고
돈을 내민다
묻지 말라고
쥐여준 현금 한 장
그건 위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