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눈물과 노란봉투법 [강수돌 칼럼]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고자 나온 ‘노란봉투법’, 이 법이 그를 넘어 노동자에게 환한 웃음까지 주려면 ‘자본 주권’ 시대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노동자 파업으로 수조원대 경제 손실” 같은 압박 문구는 역설적으로 노동자가 평소에 자신의 생명력을 갈아 넣으며 얼마나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지 드러낸다.
- 수정 2025-08-28 18:40
- 등록 2025-08-28 18:09

강수돌 |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강수돌:: 윤석열 정부에서 2023년 11월과 2024년 8월,
두차례 국회 통과에도 대통령 거부로 폐기된 ‘노란봉투법’이 이재명 정부 석달 만에 가결됐다.
정권 교체(더불어민주당으로) 효능감이자, 노동계의 20년 숙원 사업 해소!
왜 ‘노란봉투’인가?
이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이후 사쪽의 억대 손해배상 청구에 ‘깨시민’들이 ‘노란봉투’로 저항한 데서 유래한다.
2013년 11월,
법원이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47억원 손배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배춘환)이 ‘노란봉투’ 성금을 ‘시사인’에 보냈다.
“해고 노동자에게 47억을 배상하라는 이 나라에서 셋째 낳을 생각을 하니 갑갑해서 작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고 싶어서 … 47억원 … 듣도 보도 못한 돈이라 여러번 계산기 두드렸더니 4만7천원씩 10만명이면 되더라고요.”
실은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자본의 ‘손배 가압류’ 공세로 배달호(78억원), 김주익(150억원) 등 많은 노동자가 자살했다.
비극의 반복을 막고자 평범한 엄마가 용기를 낸 것!>
화담사유:;
이 사건은 단순한 법안 통과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고 의미화하느냐의 문제로 읽을 수 있다.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힘 앞에서 개인의 삶은 언제든 파괴될 수 있고,
억대의 손배 청구는 그 파괴를 제도적으로 합리화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 압박 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연대와 저항으로 길을 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 평범한 시민의 작은 행위가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상징했다는 사실이다.
거대한 억압에 맞서 거창한 혁명이나 제도가 아니라,
단지 봉투 하나,
성금 하나로 시작된 것이 집단적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삶은 언제나 불합리와 불균형 속에 놓여 있지만,
인간은 그 속에서 여전히 ‘작은 시작’을 통해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억압의 굴레를 깨뜨린 것은 거대한 이념이나 당위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한 개인의 용기였다.
그 용기는 결국 법과 제도를 바꾸는 동력이 되었고,
비극적 반복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의 증거가 되었다.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자 하는 연대의 힘이 역사를 전환시킨 것이다.
즉, 이 사건은 불합리한 고통 앞에서 인간이 무력하지 않음을,
고통을 통해서만 공동체적 긍정과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음을 드러낸다.